자세히 알 수 없으나 중국과의 지리적 관계나 久遠한 역사적 관계로 보아 적어도 韓氏朝鮮時代로부터 일부 사회(진단학회, 1981 : 568)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B. C. 108년에 한사군이 설치되었고, 당시의 유물에 한자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한자는 식사층에게 일찍이 전파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의 정복전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실질적인 농경지의 확보와 민호의 획득을 통한 국력배양에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전제왕권의 자존적 대외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인국에 대한 정토를 합리화하는 동시에 주 정복대상에 대하여는 그러한 복속관계를 구체화하고자 하였던 점에 있다고 하겠다.
식이나 지나친 편견을 주입시켜 과거에 일어나지 않았던 사실들을 포함시킬 경우가 많다. 이러한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된 ‘기록의로서의 역사’를 필자는 ‘비과학적인 역사’라고 규정하였다.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은 이런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과학적 분석 과정을 통하여 재구성하는 작업을
계승의식을 다루어 볼 것이다.
정치면에서는 지방제도를 다루어 고구려와 중복되는 지역의 통치와 각 지방에서 외교시에 사용했던 교통로를 통해 발해의 지방통치제도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문화면에서는 발해건축 중 온돌과 고분을 통해 그 안에서 우리 민족이 이루어 놓은 공통성을 찾아내고 나